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뮌헨 협정 (문단 편집) === 독일을 확실히 제압할 전략의 부재 === 결국 위에 나타나는 것들을 종합하면 "당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프 양국에는 여론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독일의 야욕을 꺾을, 즉 독일을 단기간 내에 확실하게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로 귀결된다. 괴벨스가 뻥튀기를 좀 시키긴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나치 독일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 단독으로 맞설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두 국가는 독일과의 전쟁을 감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영프의 국력 합이 독일보다는 강했으나 압도적으로 강한 것은 아니었던 데다, 양국이 연합하더라도 그 힘이 두 국가의 국력을 합한 그대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하더라도 두 국가의 국력 합은 피해를 최소화하고 단기간 내에 모든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는, 즉 독일에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때문에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제1차 세계 대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갈 가능성이 컸고 게다가 경제적으로 크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게 아닌 상황에서 독일의 국력 또한 1차 대전 직전 수준보다는 상대적으로 상당히 발전한 상황이라 양국이 입을 피해는 [[제1차 세계 대전]]보다 훨씬 클 것이 분명했다. 물론 전쟁이 장기화되면 [[제1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전하기 이전처럼 미국이 국채 매입을 통한 자금 지원과 무역을 통한 자원 제공과 물자 공급을 실시하며 간접적으로 영프 양국을 지원하고 나설 가능성도 있었고 소련이 빈틈을 노리고 참전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런 가능성에 기대기에 독일과의 전쟁은 양국에게 생사가 걸린 너무나 큰 문제였다.[* 뭣보다 영프와 독일이 싸우는 사이 소련이 어부지리를 노리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때문에 이른 시기부터 혹시 모를 독일의 팽창 야욕 재발과 유럽 국가들 간 충돌을 막기 위해 유럽 문제에 [[미국]]을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당시 몇몇 이들을 중심으로 만약 미국이 유럽 문제에 개입한다면 유럽 문제는 손쉽게 해결될 사안이라는 의견이 나왔고 실제로도 그게 맞았으나,[* 실제로 미국은 영프독 삼국을 합한 수준의 경제력과 압도적인 모든 분야 생산 능력을 중심으로 막강한 국력을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드러낸 바가 있었다. 때문에 실제로 히틀러가 미국을 업신여긴 것과는 별개로 독일 수뇌부도 만에 하나라도 있을 미국의 유럽 문제 개입 가능성에 대해 제법 중요하게 여겼고 미국 내 여론이나 정치권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미국의 개입을 최대한 막으려고 하고 있었다.] 미국이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1938년은 미국 입장에서도 [[대공황]]의 타격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한숨을 돌리려던 상황이었고, 미국의 핵심 이권 지역들 중 하나였던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제국의 팽창으로 말미암은 긴장 관계의 악화로 유럽에 신경을 쓰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상대적으로 개입주의 성향을 띄던 미국 국무부(와 이를 중심으로 한 행정부)와 고립주의를 주장하던 상원 외교위원회(와 이를 중심으로 한 의회)의 충돌이 고립주의를 지지하던 여론을 업은 상원 외교위원회의 압도적 승리로 끝난 후[* 이때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가장 먼저 행한 조치 중 하나가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안을 부결시키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국은 자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제창하여 창립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고 미국의 부재는 국제연맹이 식물 기구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대공황 문제까지 겹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은 유럽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정치-경제-군사적 방법들을 많이 포기한 상황이었다.[* 사실 순수하게 미국의 국익만 생각하면 이게 맞긴 했다. 애시당초 미국은 이 당시 당사자도 아닌 만큼 굳이 남의 일에 끼어들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을 정말로 당사자로 만들어준 덕택에 정말로 나서게 되었다.] 거기다 나치의 팽창 야욕이 본격화된 1930년대 말까지도 미국의 여론은 전면적인 고립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미국 정치권이나 미군의 관심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미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프랑스 침공|프랑스가 함락된]] 후인 1941년 1월 6일 [[https://kr.usembassy.gov/ko/education-culture-ko/infopedia-usa-ko/famous-speeches-ko/f-d-roosevelts-four-freedoms-speech-ko/|네 가지 자유]]로 널리 알려진 연두교서 발표 연설에서 유럽 등 전세계에서 커져가는 공포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압제 정치]]와 독재자들, 독재 제국을 언급하면서 이에 미국이 적극적을 개입하여 대항해야 함을 암시하기도 하였으나 이 시점에서도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개입에 회의적인 여론이 조금 더 우세했으며 이런 미국의 기조를 뒤집어 놓은 것이 [[진주만 공습]] 사건이었다.] 때문에 미국은 유럽 문제에 있어서 유럽인들의 자주적 선택을 존중한다며 개입하기를 거부하였고 오히려 뮌헨 협정 당시에는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지지하고 나서며 대화와 타협으로 이 문제를 영프독 삼국이 풀어가라고 주문하기도 하였다.[* 물론 아래 언급되듯 존 F. 케네디처럼 대독 유화책을 비판하면서 미국이 이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들도 존재하였으나 아직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즉, 소련과의 협력 가능성은 영-프 양국이 사실상 스스로 걷어찬 상황에서, 폴란드는 독일과의 불가침 협약 이행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협정으로 체코 땅 일부를 할양받아 이득을 챙길 생각만 하고 있었고 미국마저도 여러 문제로 인해 직접 개입을 거부하며 미온적으로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독일을 빠른 시일 안에 확실하게 제압할 수단이 없었다. 이는 결국 여러 다른 사유들과 얽혀 영프 양국이 팽창 야욕이 뻔히 보이는 독일과의 평화체제 구축에 나서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결국 이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